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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생애

손기정 생애양정에서 키운 꿈

크고 작은 여러 시합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평안도의 대표선수로 인정을 받기 시작한 때도 이쯤이었다. 19세 때인 1931년 10월, 양정에 입학하기 몇 개월 전 손기정 선수는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체육대회(조선신궁대회)에 평안북도 대표로 출전하게 된다. 이 대회의 5,000m 달리기에서 전국의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6분 3초의 기록으로 1위를 기록한다.
다음 해인 1932년 3월, 그는 생애 첫 마라톤 시험대에 오른다. 일종의 하프 마라톤이었던 동아일보 주최 경영마라톤에서 1위 변용환에 이어 2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며 장래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두 경기의 공식적인 성적으로 당시 양정 육상부원이었던 고향선배 황대선에게 부탁해 나이를 두 살 줄여 힘들게 입학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손기정 선수는 대부분의 선수생활을 양정 소속으로 지냈으며, 올림픽 우승으로 양정고보에서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외버선 모양의 육상화 _ 지카다비

  • 1930년대 양정고

  • 손기정 양정고등보통학교 학생증

손기정 선수의 선수생활에서 특징으로는 800m, 1,500m, 5,000m, 10,000m등의 중장거리 부분에 관한 기초과정을 충실하게 밟아 나갔다는 점이다. 또한 400m등의 단거리 경주도 출전했다.
이 부분에서 그가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경주에 필요한 순발력과 스피드를 갖추기 위해 노력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 전념할 무렵의 1935년에 치룬 경기일정을 살펴보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42.195km를 완주한 경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35년 3월 21일, 4월 3일, 4월 28일, 5월 18일, 9월 29일, 10월 20일, 11월 3일에 열린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사실은 놀라움 이전에 상식을 초월한 기괴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초인적인 기량이었다. 베를린 올림픽을 서너 달 앞둔 시점에서도 4월 18일 마라톤에서 완주 및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손기정 선수는 큰 대회에 강한 선수였다. 선수로서 꼭 인정받아야 하는 중요 경기에서 어김없이 대기록을 세웠고, 베를린 올림픽 예선을 겸한 1935년 전 일본 마라톤 대회에서는 2시간 26분 14초로 1위, 11월의 메이지신궁대회에서도 2시간26분 41초로 1위로 입상했다. 특히, 손기정은 마의 30분벽이 깨지지 않았던 올림픽 기록(10회 우승자: 자바라, 2시간31분 36초)을 포함해 세계 신기록을 갱신해나갔다.

  • 1935년 일본 메이지 신궁 대회에서 우승 후 시상대에 선 손기정 선수

  • 1935년 11월 메이지신궁대회는 손기정 선수가 세계신기록을 세운 자랑스러운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손기정 선수와 우리 민족에겐 가슴 아픈 날이기도 했다.
    세계 신기록을 세워 시상식에 오른 손기정 선수의 귓가에 「기미가요」가 울려 퍼졌다.
    스탠드의 관중들도 이에 맞춰 제창하고 있었다. 시상대 위에 홀로 우뚝 선 손기정 선수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일본의 호치(報知) 신문 (1935년 11월 4일 자)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표창대 위에 올려진 손군은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고개를 숙이고 스탠드의 관중이 부르는 국가에 묻혀 조용히 눈물짓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서러움과 분함의 눈물이었다. 국가 연주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양정응원단석 바로 밑 필드에 있던 인솔교사 김연창에게 달려간 손기정 선수는 우리말로 “선생님! 선생님! 왜 우리나라는 국가가 없습니까? 어째서 「기미가요」가 조선의 국가입니까?” 라며 울부짖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일본 기자들이 손기정 선수가 왜 저렇게 울고 있냐고 물어왔고, 함께 울고 있던 김연창은 베를린 올림픽에 나가게 되어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라며 둘러대야 했다.

    선생님! 선생님! 왜 우리나라는 국가가 없습니까? 어째서 「기미가요」가 조선의 국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