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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생애

손기정 생애지도자 손기정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1945년 말 손기정 선수는 권태하, 김은배, 남승룡 등 일제하에서 한국 마라톤을 주도했던 인물들과 함께 한국 마라톤 재건을 위해 ‘조선 마라톤 보급회’를 창설했다. 마라톤 보급회의 깃발을 올린 후 합숙 훈련에 참여한 젊은 선수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인재인 서윤복 선수를 훈련시켜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출전시키게 된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간단치 않았다. 서윤복 선수는 처음부터 마라톤 선수는 아니었다. 1945년 12월 해방 기념 체육대회 때 손기정 선수는 장거리 선수였던 그를 처음 보게 되고, 그의 기량을 믿고 마라톤 선수로서의 자질을 키워주게 된다. 그 후로는 뛰었다 하면 1위여서 국내 최고의 마라토너로 발돋움하게 됐다. 세계대전 동안 각종 스포츠 대회가 모두 중단되고 있었으나 전쟁의 소용돌이 밖에 있던 미국에선 스포츠도 활기를 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수십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한국이 출전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 덕분이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던 미국 선수 존 켈리는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보다 그가 신은 운동화에 더 큰 관심을 가졌었다.
그때 손기정 선수와 일본 선수들은 엄지와 나머지 네 발가락 사이가 갈라진 벙어리장갑 모양의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있었는데, 존 켈리는 손기정 선수의 저력이 그가 신은 이상한 운동화에 있다고 생각하고 손기정 선수에게 운동화를 줄 수 있는지 요청하자 손기정도 마라톤우승시 신었던 신발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까맣게 잊고 있던 켈리로부터 신비스러운 운동화의 신통력 덕분인지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는 기쁨과 감사의 뜻을 적은 엽서가 날라 왔다. 그리고 존 켈리처럼 손기정은 이떄 보스턴 마라톤이라는 국제 마라톤 대회에 더 큰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국제 대회에서 우리 선수들이 인정을 받게 된다면 침체되어 있는 육상 등 체육계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뿐더러 지쳐있는 국민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어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보스턴 마라톤의 참가를 위해 백방의 노력 끝에 미군정청과 미군들의 기부 등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손기정, 남승룡, 서윤복 세 사람은 미국으로의 여정에 오를 수 있었다.
  • 조선마라톤보급회

  • 미국의 교포 집에 머물면서도 녹록치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서윤복 선수의 컨디션을 위해 뒷바라지를 마다하지 않았다. 1947년 4월 19일. 보스턴의 하늘은 맑게 개었다. 보스턴 시가 중심에서 떨어진 렉싱턴이라는 곳은 푸른 하늘과 푸른 들판, 꿈같은 아지랑이로 온통 봄빛에 물들어 있었다. 2시간 26분의 최고 기록을 가진 핀란드의 히테넨, 전 해 우승자인 그리스의 가이조르…… 핀란드와 그리스, 캐나다, 터키, 벨기에, 아르헨티나, 미국, 한국 등 8개국에서 모여든 1백 53명의 선수가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출발선에 모여 섰다. 서윤복 선수는 첫 비행기 여행에 불면증으로 고생해 컨디션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낮 12시. 출발 신호에 맞춰 서윤복 선수와 남승룡 선수가 어깨를 나란히 출발점을 뛰쳐나왔다. 서윤복 선수는 5km지점까지도 중위 그룹을 달리다가 10km 지점에서부터 상위 그룹으로 올라섰다.

윤복아! 조국을 위해 싸워라!

손기정 선수는 감독으로서 목청 높혀 서윤복 선수를 응원했다. 조국이란 단어, 민족이란 낱말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던 때였다. 그 조국을 잃고 나라 뺏긴 민족이 되어 일제에 시달린 게 몇 해이던가. 그들은 광복된 조국의 대표로서 처음 세계무대에 나와 선 것이었다. 아침에 겨우 주먹밥 두 덩어리로 끼니를 때운 서윤복 선수는 응원에 힘입어 28km 지점에서 드디어 히테넨을 따라 잡았다. 중간에 개가 코스 가운데 뛰어드는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넘어져서 선두를 잠시 놓쳤었지만, 하트 브레이크 힐에서 다시 역전의 길을 터 우승의 길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 이후에도 서윤복 선수의 운동화 끈이 풀려 모두를 긴장하게 했지만 운동화에 물을 끼얹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1947 서윤복 우승사진

2시간 25분 39초. 히테넨 선수가 세웠던 세계 최고 기록을 돌파하면서 서윤복 선수는 영광스런 우승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서윤복 선수의 페이스 조절을 위해 함께 ** 뛰어 주었던 남승룡 선수도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시간 40분 10초로 12위를 마크했다. 우승한 서윤복 선수의 가슴에서 빛나는 태극 마크가 코리아의 승리. 당당한 독립 민족의 승리를 외치고 있었다. 훗날 손기정 선수는 서윤복 선수가 부러웠다고 회고한다. 태극기를 달고 뛸 수 있는 그는 얼마나 자랑스러운 존재인가. 베를린에서 일장기를 달고 뛰던 그와 자랑스럽게 태극기를 달고 가슴을 펴고 뛰는 서윤복 선수의 모습이 겹쳐지며 감격 했다고 한다. 보스턴 하늘 높이 태극기가 올랐다. 시상대 위에 올라선 서윤복 선수도, 관중석에 선 손기정 선수도 복받쳐 오르는 감격에 못 이겨 눈물을 흘렸다. 태극기를 달고 이룬 최초의 승리였다. 잃었던 조국을 다시 찾고, 잃었던 태극기를 다시 찾아 세계에 조국의 건재를 알린 것이었다. 광복에도 불구하고 심란하던 나라 정세에 민족의 단합이 절실하던 때,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준 승리였다.

첫 출전에 시원스럽게 1위를 차지한 한국 선수들에 대해 대단히 놀란 기자들은 당시 한국의 존재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우승 후에도 여비가 바닥이 나 곤란에 빠졌었으나 마침 외교 사절로 미국에 왔던 후일 우리나라 첫 여성 장관인 임영신 씨의 도움과 동포들의 모금으로 여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뉴욕에서는 남궁 총영사 댁에서 환영회가 열려 재미 한국인들과 미국의 유명 인사들이 함께 모여 있는 와중에 반가운 소식을 전해져왔다. 국제 육상연맹의 헬리스 씨가 “에이버리 브런디지 씨가 초대에 응하지 못한 대신 그의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브런디지 씨는 여러분이 내년 런던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고 전해옴과 동시에 일제히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당시 해방 후 독립된 하나의 정부를 세우지 못했던 한국은 국제 사회에서 완전한 독립 국가로 대접받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국내 체육계에서는 런던 올림픽 참가를 위해 백방으로 힘쓰고 있었다. 마라톤 보급회에서도 런던 올림픽 출전을 위해 미국 육상계와 체육계의 유력 인사들에게 특별 메시지를 보내 올림픽 출전에 협조해 주도록 부탁하고 있었다. 미국 내에서 동포들로부터 축하와 인사를 받은 후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요코하마를 거쳐 20여 일 만에 인천항에 도착했다. 요코하마에 들렀을 때엔 재일 거류민 단장이던 박열 씨의 안내로 동경에 머물고 있던 비운의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이은 공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고종의 셋째아들 순종의 이복동생으로 태어나 1900년 영친왕으로 책봉되었으나 11세에 볼모로 잡혀와 일본에 억류된 지 40년, 일제에 의한 정략결혼으로 일본 귀족의 딸 이방자 씨와 결혼했다. 망국의 한을 서러워하다가, 나라를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불안한 정정(政情)에 오히려 더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이은 공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6월 22일, 인천에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개선 입항 했다. 서윤복 선수는 보스턴에서 받은 승리의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손기정감독과 남승룡 코치는 단기로 가져갔던 커다란 태극기를 펴 흔들었다. 인천 제일 부둣가에는 수만 명의 환영 인파가 몰렸고, 인천 시내 가가호호에 개선을 축하하는 태극기의 물결이 춤을 추었다. 부두에서 덕성 유치원생들로부터 축하의 꽃다발을 받고 그 길로 시가를 행진, 인천중학 교정의 시민 환영대회에 참석했다. 그 다음날까지 시가행진은 이어졌고, 서울도 경축 일색이었다. 과도 정부와 조선 체육회가 마련한 환영식은 중앙청 앞뜰에서 이루어졌다. 환영식장에는 조선 체육회장 여운형 선생, 김규식 박사, 주둔군 사령관 하지 중장, 육상연맹 회장 정항범 씨 등 많은 인사들이 나와 축하해 주었다. 이 자리에서 손기정은 체육인으로서 한민족, 대한의 국민으로서, “우리 서윤복 군이 오늘 우승해서 개선한 것은 서 군 자신의 노력도 노력이거니와 온 국민들의 큰 성원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처럼 성대한 환영식을 베풀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국으로 원정 떠날 때엔 모두들 어디에 가 계셨습니까? 나는 애국자이신 여러 어른들보다 우리 서윤복 군이 더 큰 일을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저희들이 마음 놓고 운동할 수 있도록 안정된 사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라고 하였고 남승룡은 “우리가 떠날 때에는 쓸쓸하게 떠났는데 이기고 돌아오니 이렇게 성대한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11년 전에 제가 손기정 군과 베를린에 갈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피상적인 환영회보다는 우리 체육계의 젊은이들을 위하여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라고 말해 당시 시국의 어수선함에 묻어 생색만 내던 인사들을 나무랐다. 며칠 후 백범 김구 선생의 거처인 경교장을 찾아 간 그 들은 ‘족패천하’라는 글을 선물 받으며 축하 인사를 주고받았다. 김구 선생은 우리 민족은 적어도 두 다리로 싸우는 데서는 지는 법이 없다며, 일행을 환영하며 “돈 안 드는 다리 싸움에는 우리가 제일”이라고 농담했다.

시상대 위에서 물결치는 태극기들

1950년 4월 19일. 다시 한 번 보스턴 마라톤에 출전하게 된다. 손기정은 코치로서, 최윤칠, 함기용, 송길윤 등 3명의 선수들을 인솔했다. 함기용 선수는 마라톤 보급회가 선수 발굴 차 춘천에 들렀다가 찾아낸 선수로, 춘천사범에 다니던 그는 자갈밭 길을 맨발로 뛰어다닐 만큼 의지가 대단한 선수였으며 송길윤은 서윤복 선수의 숭문고 후배였다. 최윤칠 선수는 당시 좋은 기록으로 가장 큰 기대를 모으고 있는 선수였다. 당시에도 체육회에는 지역에 따른 파벌이 존재했다. 최윤칠 선수를 지도하는 쪽이나 그를 배출해 낸 함경북도 도민회에서는 사이가 좋지 않는 선수와 코치가 한데 어울려 떠나는 것에 대해 걱정이 대단했다. 함북 도민회에서 ‘손기정이 인솔하는 한 최윤칠은 이길 수 없다’는 얘기도 나올 정도로 최윤칠 선수를 걱정하고 손기정 선수의 코치직에 대해 우려했다. 단천에서 최윤칠 선수를 데리고 왔던 서광 씨가 일부러 함북 도민회의 환송식장에 손기정을 불렀다. 손기정은 못미더워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코치로 가는 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불안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끼리만 패가 다르다느니, 누가 누구 편이라느니 하고 있을 뿐입니다. 미국에서야 우리 한국 선수 3명이 오는 것으로만 알지 어느 지역, 무슨 선수라는 걸 알 턱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 선수들 중 누구든지 한 사람이 우승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세 사람 중에 누가 우승할지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이길 사람을 개인감정 때문에 못 이기게 하고서야 어떻게 한국의 우승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세 사람의 단합이 제일 중요합니다. 단합만 이루어진다면 누구든 한 사람은 반드시 우승합니다. 만약 세 사람이 먼저 싸워야 한다면 무엇 때문에 큰 돈 들여서 세 명씩이나 보스턴에 보내겠습니까?” 함북 도민들도 더 이상 코치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당시 런던 올림픽에서의 마라톤 참패로 서로 헐뜯고 싸울 만큼 여유도 없어, 우선 누구든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만약 이 대회에서도 진다면 앞으로의 국제 경기 출전 경비 지원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회를 앞두고 최윤칠 선수의 다리에 이상이 생겼다. 심한 근육통으로 뛰느냐 못 뛰느냐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그는 어떻게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마취주사라도 맞고 뛰겠다고 고집했다. 지도자로서의 결단이 필요했다.

1950 보스턴마라톤대회

“윤칠 군. 주사를 맞고 뛴다면 주사 맞은 자리가 굳어질 테고 또 심한 운동으로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점에 책임질 수가 없어. 차라리 주사를 맞지 않고 뛴다면 내가 네 성적에 책임을 지마. 만약 세 사람 중 누가 우승하려면 또 다른 한 사람의 희생정신이 필요하다. 자, 어떻게 할 테냐?” 최윤칠 선수는 이미 자신의 다리에 일어난 고장으로 마음의 각오를 굳히고 있었다. “그럼 제가 앞서서 뛰겠습니다.“ 그는 마취제를 맞지 않고 동료선수들을 위해 앞장서서 외국 선수들을 유도했다. 그 다리의 고통, 마음의 고통을 손기정 선수도 모를 리 없었다. 최윤칠 선수의 보이지도, 기록되지도 않은 도움을 받아 함기용, 송길윤이 1·2위로 나란히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우승의 기쁨에 넘쳐 결승점에서 환호하던 손기정 코치의 눈 앞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디쯤에서 기권해 차를 타고 들어 올 줄로만 알았던 최윤칠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두 동료를 위해 참가국 선수들을 유인해 기력을 빼놓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역주하여 다른 한 선수와 붙어 경쟁하며 달리고 있었다. 손기정은 벼락같이 달려가 소리를 질렀다. “윤칠이! 여기가 어딘데 꾸물거리는 거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힘이 났는지 최윤칠 선수는 마지막 300m를 사력을 다해 달려 3위를 차지했다. 손기정 선수는 훗날 최윤칠 선수에 대해 한국 마라톤은 아마 그만한 인물을 두 번 갖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장사요, 대포알 같은 주력을 가졌다. 나는 함기용, 송길윤 군의 1·2위보다 최윤칠 군의 3위가 더 소중하고 의미 깊은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해 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함기용 2시간 32분 39초 우승, 송길윤 2시간 35분 58초 2위, 최윤칠 2시간 39분 45초 3위. 제 54회 보스턴 하늘에는 태극기만이 가득했다. 전 세계 마라톤계에서는 또 한 번 한국 마라토너들의 저력에 탄복했다. 1947년 서윤복 군의 우승에 이어 1950년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2·3위를 휩쓸어 미국 내에는 코리아의 선풍이 일어났다. 보스턴 총영사 김용식(金溶植) 씨를 비롯해 미국 내에 체류하거나 유학 중이던 교포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선수들을 축하하고 격려해주었다.

6월 20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국내에서도 대환영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함기용과 손기정 코치의 손을 쥐고는 “수고들 했어. 정말 잘들 했어”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부산에서부터 대구, 대전, 서울에서 연이어 환영대회가 베풀어져 전국의 도시에서 태극기가 나부꼈다. 귀국 5일째 되던 날인 6월 25일. 선수단과 코치단은 함기용의 고향인 춘천 환영대회에 가려 했으나 오히려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민족상잔의 전쟁이 터진 것이다. 1952년 1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한 대통령 직선제, 국회 양원제 개헌을 둘러싸고 전쟁 중에도 어용 시위, 국회의원 피습 등으로 정국이 소란스러웠다. 정치적 기반이 제대로 잡히지 못한 채 전쟁이 터져 정치인들조차 우왕좌왕 했다. 당시 정치 활동을 한다는 것은 권력을 잡지 못하면 큰 위험 부담을 안고 있어야 했다. 마라톤 보급회 일을 하던 이영근 씨는 국회의장 조봉암 씨를 도와 그 밑에서 정치활동을 벌이다가 붙들려 갔다. 피난처 부산에서 일어난 정치파동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마라토너의 맥을 근근이 이어갈 수 있게 했던 마라톤 보급회도 숨이 끊기고 말았다. 이후에도 손기정은 제 3회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이창훈 선수를 지도해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육상연맹회장, 한국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KOC 상임고문 등을 맡아 88 올림픽 유치에 힘쓰는 등 대한민국 체육계를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손기정 선수는 우리나라 마라톤에 있어서 최초의 우승자인 동시에 위대한 지도자였다. 1947년의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25분 39초 세계최고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서윤복 선수, 1950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1·2·3위를 차지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선수, 1952년 헬싱키 올림픽 4위 최윤칠 선수, 1956년 멜버른 올림픽 4위 이창훈 선수…… 약 10여년의 우리나라 마라톤의 두 번째 황금기를 이끈 지도자는 손기정 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광복 이후 국내외 한민족의 단합이 어려웠던 시기, 다시 한 번 마라톤으로 민족의 가슴을 뜨겁게 적신 참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의 쾌거는 그가 선수로서의 자질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역량도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