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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손기정 선수 이야기

손기정기념관으로 출발! 한국을 사랑했던 손기정의 이야기 속으로

어떤 곳인가요?
손기정(1912~2002)은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잃었던 그 후 2년 뒤에 평안북도 신의주 남민포동에서 아버지손인석, 어머니 김복녀의 3 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어요. 우리나라의 땅, 역사, 문화, 말과 글도 모두 빼앗겼던 암울한 시기에 태어난 손기정이었어요. 게다가 신의주는 매우 춥고 홍수가 자주나는 곳이어서 손기정의 집이 무너지곤 해 가족이 가난 속에 몹시 힘들었어요.

손기정은 어렸을 때부터 달리기를 좋아했어요. 직접 학비를 벌어야 할 정도로 가난과 싸워야했지만 학교 생활을 열심히 했고 틈틈이 달리기를 했어요. 신의주의 집과 약죽보통학교는 2km가 넘었어요. 그 두 곳을 오가면서도 압록강 다리를 건너면서도 친구들과 놀면서도 달리기를 했어요. 손기정은 꾸준히 달리면서 인력거꾼도 따라다니고 자전거 타는 친구들도 따라잡으면서 달리기 실력이 점점 좋아졌어요. 하지만 손기정의 어머니는 손기정이 책상에 앉아 공부하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일부러 잘 벗겨지는 여자 고무신을 사주었지만 손기정은 끈으로 발등과 신발 밑을 하나로 묶어 달렸어요. 거친 끈에 발등이 벗겨지기도 했지만 손기정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어요.

어느 날, 손기정은 학교 운동회에 달리기 선수로 출전했고 멋지게 우승했어요.
이 모습을 어머니가 지켜보고 있는 줄 몰랐던 손기정이었어요. 며칠 뒤 우승을 한 손기정에게 그의 어머니는 새 신발을 사주었어요. 일본인들이 파는 고무바닥과 벙어리장갑 같은 모양이 특징인 지카다비였어요. 손기정은 뛸 듯이 기뻐하며 더욱 세차게 달렸어요. 결국 신의주 대표로 출전했던 손기정은 어른들을 제치고 우승했어요.

학교 선생님이자 달리기 선수였던 이일성 선생님은 손기정의 달리기 실력을 한 눈에 알아보았어요. 달리기 선수가 되는 꿈을 손기정에게 심어주었지요. 손기정은 더 훌륭한 달리기 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지독한 가난 때문에 학비를 벌어야만 했어요. 학비를 벌면 한 학기를 다니고 다시 휴학하여 학비를 벌어야만 했어요.

1932년 20살, 늦은 나이였지만 손기정은 전국에서 육상 선수를 기르는 최고의 학교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합격했어요. 그 곳에서 손기정은 육상부 활동을 할 수 있었어요. 각종 대회에서 신기록을 세우고 세계최고기록도 세웠어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손기정의 달리기를 주목했어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사람들은 많은 것을 빼앗겨 나라를 되찾기가 힘들었어요.

그 때 손기정의 달리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어요. 모든 것을 빼앗겨 말라버린 마음에 최고의 기록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힘을 불러일으켰어요. 손기정이 일본인을 상대로 이기면 마치 전투에서 이긴 것 처럼 환호했어요. 그 힘으로 손기정은 점점 더 실력이 좋아졌고 더 가볍고 빠른 선수가 되기 위해 신발 밑창을 깎거나 상의를 자르기도 했고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차 다리 힘을 기르는 훈련법을 스스로 만들기도 했어요.

손기정은 점점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랑거리이자 자존심이 되어갔어요. 많은 사람들이 손기정의 달리기를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것 처럼 열심히 응원했어요.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이 독일에서 열리게 되자 손기정 은 마라토너로서 꿈을 이루기 위해 당당히 일본 선수들과 겨뤘고 월등한 성적으로 출전권을 따냈어요.
세계 속 손기정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스타디움에서 49개의 나라에서 모인 56명의 선수 42.195km를 달려....